불공정거래 감시커녕 10분 유혹 빠져 정보 유출
“거래소 직원 내부 비리 어제 오늘 일 아니다”

한국거래소의 모럴해저드가 심각하다.

시장을 관리·감독해야 할 한국거래소에서 투명하고 건전한 자본시장 질서에 역행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주가조작에 개입하거나 상장폐지 기업에서 뒷돈을 받는 뇌물사건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최근 한국거래소 직원이 기업 주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공시 정보를 사전에 유출한 혐의로 조사를 받던 중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증권업계에 따르면 한국거래소 코스닥시장본부 소속 이모(51)씨가 지난 18일 경기도 고양시 임진강 하류 부근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이씨는 지난해까지 부산에 위치한 파생시장본부 소속 팀장으로 근무했으며 지난 2월에 코스닥본부 팀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던 중 최근 기업공시 정보를 공시 직전 외부로 유출한 혐의로 거래소에서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난 15일 돌연 잠적, 3일 뒤 숨진채 발견됐다.

이씨가 소속된 시장운영팀은 시장운영을 위해 필요한 시장 조치를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어 모든 공시를 사전 열람할 수 있다.

이씨는 상장기업이 거래소에 공시 내용을 접수한 뒤 실제 공시되기까지 10여분 간의 공백이 있는 공시시스템을 악용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상장기업이 한국거래소에 공시 내용을 접수하면 반기별·분기별 실적 등 지표는 기업이 등록하면 시간적 격차없이 외부에 공개되지만, 계약·인수·합병·수주 등 수시 공시사항은 10여분간 확인·심의를 거쳐 외부에 공개된다.

이씨는 이 짧은 시간을 이용해 기업정보를 외부에 제공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실제 거래소 내부조사 결과에서 이씨가 정보를 유출한 시점 이후 공시가 이뤄지지 않았음에도 한 증권사 계좌를 통해 해당 종목에 대한 대량 매수 주문이 들어왔던 것이 확인했다. 이런 방식으로 이씨가 지난 4월부터 최근까지 거둬들인 차익은 1억여원에 달한 것으로 조사됐다. 더불어 작전세력 등 조직적인 세력의 연루 가능성도 높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검찰은 이씨가 A증권사에 조직적으로 정보를 넘겨줘 훨씬 더 큰 규모의 불공정거래에 활용됐다는 의혹을 제기한 상태다. 이씨가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전방위적 수사를 펼치고 있다.

사건발생 이후 거래소는 공시 정보 접근이 가능한 전 직원에 대해 불공정거래가 있었는지 조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공시는 주식시장에서 가격과 거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중요사항에 관한 정보를 알림으로써 공정한 가격형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같은 공시제도는 투자자 보호를 위한 기업의 의무다.

2000년 8월 미국 증권거래소가 공정 공시제도를 처음 도입했고, 한국도 2002년 2월부터 운영하을 시작했다.

▲완전한 공시(좋은 정보, 나쁜 정보든 핵심사항을 빠짐없이 공개) ▲적정성 공시(투자자가 언제 어디서든 쉽게 정보 열람) ▲적시 공시(사유 발생하면 지체 없이 공개) ▲알기 쉬운 공시(일반 투자자들도 이해 쉽도록 공개) 등 4가지 기본 원칙을 두고 있다.

한국거래소는 이번 공시정보 사전 유출 사건으로 설립 근간이 흔들릴만큼 위기에 직면했다. 공시정보를 사전에 유출한 사실만으로 투자자의 신뢰를 무너트린 셈이기 때문. 공공성과 신뢰성을 한꺼번에 무너뜨렸다.

최명철 재계3.0연구소 소장은 “직원의 모럴해저드를 떠나 이번 공시정보 유출 사건은 한국거래소의 영향력으로 볼 때 주식시장에 근간을 깬 사건이다. 거래소의 감시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라면서 “기업공시에 가장 중요한 점은 투자자 보호다. 한국거래소는 공시를 통해 부실 유가증권의 유통을 방지하고 투자자에게 정확한 투자정보 제공을 통해 증권시장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거래소도 이번 사건과 관련해 공시체계 개편을 추진하는 등 대책마련에 돌입했다. 후속대책으로 공시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는 직원을 최소화하고 공시 사항 검토 절차도 대폭 간소화 시킬 예정이라고 밝혔다.

거래소 관계자는 “직원들의 공시정보 열람기록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고 직원이 업무상 접근 가능한 정보에 제한을 두는 등 후속조치를 금융당국과 논의 중”이라며 “필요하다면 해당 부서 외에는 공시 정보를 확인할 수 없도록 하고 즉시공시 비율을 늘리는 등 강도 높은 대책을 간구 중”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이번 거래소의 대책마련에 대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러한 거래소의 공시시스템 재정비가 오히려 시장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며 우려하고 있는 상황이다.

내부 비리 여전

사실 거래소의 내부 비리 문제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3월 한국거래소 상장폐지실질심사위원회의 일부 위원들은 상장폐지를 면하게 해주겠다며 코스닥 상장사로부터 뒷돈을 받은 혐의로 검찰에 기소됐다.

같은 해 6월 경찰은 상장법인 공시책임자 연찬회를 진행하면 특정 J여행사에 연찬회 용역을 주면서 2100만원에 뇌물을 받은 거래소 팀장 등 3명을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인 ‘알리오’ 웹사이트에 게재된 거래소 내부감사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3월 실시된 특별감사에서 월간 주식거래 한도(20회)를 어기고 주식거래를 한 직원 1명이 적발된 사례도 있다.
거래소는 그 때마다 “내부 교육을 강화해 잘못된 행태를 근절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번 자살 사건까지 더해지면서 ‘비리거래소’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거래소 직원들에 비리가 끊이지 않은 이유가 솜방망이 처벌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도덕·윤리·감시 시스템의 강화가 필요하다는 조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