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주 이건산업 회장(왼쪽)과 박용현 두산그룹 회장

실패한 정계 로비 문건이 전경련 위기 원인

전경련내, 곪은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면 실패

전국경제인연합회(회장 허창수)의 위상이 예전보다 못하다.

17일 신라호텔에서 개최된 11월 회장단 회의에 4대 그룹 총수가 모두 불참한 가운데 알맹이 없는 모임을 가졌다.

이날 회장단은 2011년 경제동향, 한미 FTA 비준, 경제계 보육지원사업 추진 현황 등 국내 경제의 주요 현안에 대해 논의했다.

글로벌 경기 침체에 따른 수출부진과 가계부채 증가에 따른 내수 위축 등으로 내년도 우리 경제가 3% 중반의 성장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회장단은 국내 경제가 성장 활력을 잃지 않기 위해 기업별로 글로벌 시장개척과 성장엔진 발굴에 노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한·미 FTA 비준이 지연과 관련 국내 경제의 장기적 이익을 고려해 국회가 조속한 시일내에 비준안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회장단은 "한·미 FTA가 미국 시장에서 교역조건을 개선하는 것은 물론,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위상을 굳건히 하고 선진경제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라고 강조했다.

이밖에 저출산 해소와 저소득층 보육환경 개선을 위해 경제계 차원에서 추진 중인 국공립 보육시설 '보듬이나눔이 어린이집'도 현재 50곳에서 100곳으로 2배 확대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전경련 사무국이 지방자치단체들과 협의할 것을 주문했다.

이날 회의에는 허창수 전경련 회장과 이준용 대림 회장, 박용현 두산 회장,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 현재현 동양 회장, 정준양 포스코 회장, 이웅열 코오롱 회장, 정병철 상근부회장이 참석했다.

연말 송년 모임을 빼면 사실상 올해 마지막인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4대그룹 총수가 모두 불참하면서 “알맹이 없는 회의에 그쳤다”는 평이다.

정례 회장단회의는 매해 홀수 달에 열린다. 이번 회의가 올해 마지막이다. 이날 회의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등이 불참했다.

재계에는 정치권의 포퓰리즘적 정책 입안, 한·미 FTA 국회 비준, 부유세(버핏세) 도입 등 여러 현안이 산재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 현대차 등 주요 그룹사 회장단이 불참하면서 김빠진 회의로 마무리됐다는 평가이다.

때문에 정병철 상근부회장이 회의 후 직접 논의 사항을 이야기 하던 언론 브리핑도 취소됐다.

이에 대해 전경련 관계자는 "지난 3개월 간 회장단 차원의 행사가 연이어 개최됐다. 주요 현안들이 대부분 논의된 관계로 (이번 회의는) 참석자들 간의 간담을 중심으로 열리게 됐다"며 "그동안 있었던 언론 브리핑도 생략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앞서 회장단은 지난 8월31일 '공생발전을 위한 대기업 간담회', 9월8일 '회장단 회의', 10월5일 '전경련 창립 50주년 기념 리셉션' 등 3개월 사이에 여러 차례 만남을 가졌었다.

반면 재계에서는 불안한 글로벌 경제 하에서 비상경영 체제에 대거 돌입한 기업들을 감안해 2012년 경영 방향과 고용 창출, 정치권과의 협력 등 다양한 현안에 대한 논의가 필요했다는 지적이다.

전경련의 위상이 상실한데는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은 전경련의 위상은 추락했다. 전임 회장들이 불미스러운 일들이 발생했다. 또 재벌 일감몰아주기, 중소기업 상생현안 등 문제를 해결하면서 정치권 로비 의혹이 불거졌다.

지난 7월 11일, 전경련 사무국이 국내 10여개 그룹 임원들을 소집해 회의를 열었다. 정부의 대기업 정책 방향에 대한 재계 차원의 대응반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전경련의 배포한 문건에서‘반(反)대기업 정책입법 저치를 위한 대국회 활동’이라는 항목이 문제가 됐다. 삼성, 현대차, SK, 롯데, GS 등 6개 그룹별로 접촉할 정치인을 할당해 로비를 벌이자는 내용이었다.

구체적인 로비방안도 제시됐다. 6대 그룹에 여야 당대표와 정책위원장 등을 할당해 각 의원을 개별 면담하고 후원금, 출판기념회, 지역구사업 및 행사후원, 지역민원 해결 등을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전경련은 문건에 대해 “실무진이 추진했다가 폐기된 계획이다”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일반인들은 “전경련 수뇌부가 썩을대로 썩었다”는 비난이 들끓었다.

일각에선 해체론까지 쏟아져 나왔다. 재계일각에서조차 전경련의 문제는 사무국 임원들의 전행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일련의 파문에 대해 허 회장은“역시 잘해야 본전인 건가”라며 난처한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수장’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리더십에 상처를 입었다.

전경련의 위기는 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시작됐다. 고 이병철 삼성 명예회장, 고 정주영 명예회장 등 쟁쟁한 재계 오너로 이어져 내려오던 것이 IMF위기를 겪으며 실세 그룹 회장들이 기피하면서 비실세 그룹총수와 전문경영으로 대체됐다. 김각중, 손길승, 강신호, 조석래 회장에 이어 허창수 회장이 지난 2월에 취임했다.

허 회장은 재계에서 ‘영국신사’라는 닉네임을 얻고 있다. 그만큼 원리원칙과 명예를 중시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는 취임 첫해 부닥친 정치권 로비의혹 등으로 순탄치 않은 항로가 예상된다. 어떻게 난간을 헤쳐 나갈 것인지 궁금하다. 허 회장이 성공적으로 회장직을 수행하기 위해선 내부에 곪은 상처를 수술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본전을 찾는 재계 수장으로 허회장이 거듭날 수 있는가에 정재계 안팎의 이목이 모아진다.